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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머런스 보서크,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2019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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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청년 대상으로 문화예술지원금이 지역화폐로 지급되었고 유효기간이 생각보다 짧았다. 지원금을 소진하러 아라동 제주해양경찰청 근처의 아무튼 책방으로 갔고 거기서 아마 <이 시대의 사랑>과 이 책을 골라서 집으로 가져왔던 것 같다. 그러다 오랜만에 읽었다.

책은 네 장으로 나뉜다. 1장 사물로서의 책, 2장 내용으로서의 책, 3장 아이디어로서의 책, 4장 인터페이스로서의 책. 1장은 진흙판과 파피루스, 양피지, 죽간, 종이와 각각의 제책방식, 마침내 코덱스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지는 내용으로 굉장히 재미있는 내용이다. 2장은 금속활자와 인쇄기술로 시작하여 코덱스라는 형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은 남아 있다면 누가 책에 처음 그림을 그리고 쪽수를 적고 문단을 구분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3장은 아티스트 북에 대한 내용인데, 나머지 장들이 가지는 매체로서의 직관적 중요함을 고려하면 ‘아티스트 북’은 개념도 생소하고 그렇게 중요한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읽어보면 실제로 중요하고 뒷편 책날개를 읽어보면 저자 애머런스 보서크가 북 아티스트이기 때문에 특별히 들어간 내용이 아닐까 싶다. 4장은 킨들로 대표되는 전자책의 탄생과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인터넷 아카이브, 구글 북스의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다룬다.

각각의 제약이 책이라는 매체에 미친 영향은 진화론에 가깝고 불가피했다는 점이 책 전반에 걸쳐서 흥미로웠다. 표의문자, 또는 표의문자에서 조금 진화한 음절문자의 경우 필요한 문자가 많다는 점에서 불리하여 표음문자로 진화했다는 점은 당연하지만 재미있다. 한자의 세로쓰기는 죽간에서 비롯했을 수 있다는 얘기도 재미있고, 코덱스라는 형식이 기독교에 의해 발전했다는 점도 재미있다(p.58). 고딕체는 로만체에 대조하기 위한 이름이며, 로만체와 소문자는 중세의 암흑을 미워하고 로마 방식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에게 의해 발명되었다는 점도 재미있다. 또한 3장 아티스트 북의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인쇄술의 급격한 발달을 두려워한 시인들이 책에 그림을 넣는다거나 배치를 특이하게 하는 등의 실험을 했고 그들이 바로 블레이크나 말라르메같은 거인들이라는 것도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다.

카리온은 말라르메와 마찬가지로 페이지의 공간적 잠재력을 간파했다. 그의 선언문은 “책은 공간들의 순차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정의는 하도 성겨서 제본된 책, 카드 한 벌, 일련의 방 등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오브제나 공예품도 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정의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이 각각의 공간은 서로 다른 순간에 인식되므로, 책은 순간의 순차이기도 하다.(...)

책은 단어의 그릇도, 단어의 가방도, 단어의 전달자도 아니다.(…)

책은 시공간의 순차이다. 울리세스 카리온, p.158

읽고 나면 어떻게든 책과 독서를 분명히 더 사랑하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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