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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2011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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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와 같은 무리를 한 번도 미워해본 적이 없노라. 부정을 일삼는 모든 정령 중에서도 너 같은 익살꾼은 내게 조금도 짐스럽지 않구나. 인간의 활동이란 쉽사리 느슨해지고 언제나 휴식하기를 좋아하니 내 기꺼이 그를 자극하여 악마의 역할을 해낼 동반자를 그에게 붙여주겠노라. 괴테, <파우스트>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어떤 팟캐스트를 듣다 이 책이 굉장히 재미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읽을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그로부터 몇 년 뒤 어느 새벽 친구 집 바닥에 앉아 포트와인을 주는대로 덥석덥석 마시다가 집주인이 갑자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천선란, 황정은 등이 출연하는 최근의 독서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그 때 페란테의 이 책이 잠깐 언급되었다. 그 이후 언젠가는 이 책을 읽어야겠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읽고 난 생각은 호들갑을 떨어도 좋을 만큼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초반부는 번역이 너무 좋다. 오정희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리듬감이 너무 좋아서 원문이 원래 이렇게 리듬이 좋은 것인지 번역이 뛰어난 것인지 알고 싶을 정도였다. 초반부는 확실히 문단 구분이 특이하다. 이전 문단의 끝이 다음 문단의 처음처럼 느껴지는데 뻔뻔하게 그 사이를 문단으로 나누어 놓는 일들이 이어진다.

어릴 때는 누구나 우정에 미치는 순간이 있고 이 책에선 그 벅찬 감정이 그대로 느껴진다. 자의식이 처음 형성되는 유년기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라 주인공의 그 모든 처음을 잔인하게 목격할 수 있다. 우정, 사랑, 질투, 만족감, 수치심, 호승심, 슬픔, 분노… 내가 분명히 지나왔던 어떤 단계들. 이탈리아 남자들은 정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 남자와 비슷하면서도 참 다른 것 같다. 청양고추와 크러시드 페퍼처럼…

이야기의 마지막 몇십 쪽을 남겨놓고 ‘나의 눈부신 친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게될 때는 그저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최소한 이 부분은 완벽하게 설계되었다. 그리고 후반부는 약간 정신없다고도 느꼈지만 엔딩의 파괴력이 아주 좋다. 4부작이 고루 평가가 좋은 것 같아서 언젠가는 읽을 것 같지만 그게 근시일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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